2024년 7월, 미국 일간지 뉴욕타임스(NYT)가 '21세기 100대 도서'를 선정해 발표했습니다.
그중 1위는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1950년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가 차지했는데요,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라 굉장히 관심이 많이 생겨서 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 보았습니다.
엘레나 페란테
엘레나 페란테는 이탈리아 나폴리 출생의 작가로, 나폴리를 떠나 오랜 세월 외국에서 보냈다는 사실 외에는 현재 크게 알려진 바가 없는 작가입니다. '엘레나 페란테'라는 이름도 필명으로 작가는 오로지 작품으로만 보여준다고 말하며 미디어에도 노출되지 않고 인터뷰는 서면으로만 진행한다고 해요. 데뷔는 1999년 ⎡성가신 사랑⎦으로 이탈리아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등장했다고 합니다. 그 후 소설과 에세이집 등을 꾸준히 출간하다 2011년 '페란테 열병'을 일으킨 나폴리 4부작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를 출간하게 됩니다. 이후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와 ⎡떠나는 자와 머무른 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까지 총 4권을 출간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엘레나 페란테.
이후 그녀의 나폴리 4부작은 HBO와 RAI가 드라마 시리즈로 제작하여 영상화되었고, 그녀의 다른 작품 ⎡잃어버린 사랑⎦은 매기 질렌할 감독, 올리비아 콜맨 주연의 ⟨로스트 도터⟩로 영화화되기도 했습니다.
나폴리 4부작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
두 주인공의 오랜 관계가 출발하게 되는 유년기, 청소년기를 다루고 있는 1권은 두 소녀가 함께 성장기를 보내며 서로 영감을 주고, 질투하는 등 솔직한 감정이 드러나며 점점 깊어지는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끔 너무나 솔직한 레누의 마음이 크게 공감되기도 하면서 그 공감되는 마음을 인정하기엔 내가 너무 보잘것없고 못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그런 감정도 들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런 레누의 솔직한 마음이 저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기도 한 것 같습니다.
✪ 우리는 타인의 인생을 힘들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고 타인들도 우리 인생을 힘겹게 할 숙명을 타고 태어났다._40p
✪ 그들은 이전에 일어난 일들을 모두 과거일 뿐이니 조용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모든 것을 그냥 덮어두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도 아직도 과거의 일에 영향을 받고 있었고 우리까지 그 영향권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일을 되풀이하고 있었다._211p
✪ 선과 악은 혼재되어 있는 것이고 선은 악에 의해서, 악은 선에 의해서 더욱 강해지는 것이라고._302p
나폴리 4부작 제2권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4부작 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던 2권. 호기심으로 시작하여 나폴리 4부작을 읽기 시작했지만 1권에 비해 2권을 훨씬 흡입력 있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그 재미와 기대로 3권, 4권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여전히 청년기까지도 릴라에 대한 애정, 질투, 자격지심, 지지 등 여러 가지 마음이 뒤섞인 복잡 미묘한 감정을 가진 레누에 공감한 장면들도 역시 많았습니다. 릴라가 다시 공부를 시작할까 봐, 릴라가 함께 파티에 가줄까 봐 등등 이중적인 마음이 고개를 드러낼 때 등... 2권 마지막에 옮긴이의 말에서 극의 중심이 되는 감성은 '두려움'이라는 문장을 보고 격한 공감을 보내며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기도 했습니다.
➲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는 제1권에 이어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고 엉클어지는 릴라와 레누의 우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극의 중심이 되는 감성은 '두려움'이다. 성장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원하는 사람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사랑에 대한 두려움, 자기 자신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 통제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두려움, 선택과 결정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 삶에 대한 두려움.
✪ 작은 것 안에 있는 더 작은 것이 밖으로 나오려고 몸부림치고 큰 것 밖에 있는 더 큰 것은 안에 있는 것을 가둬두고 싶어 해._74p
✪ 모든 것이 아슬아슬하다. 위험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이들은 삶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평생을 구석에 처박혀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_404p
✪ 가면을 너무 잘 만들어서 '거의' 진짜 얼굴이 된 것 같았다.
불현듯 '거의'라는 단어가 마음에 와 닿았다. 내가 해낸 건가. 거의 그렇다. 나폴리에 있는 고향 동네에서 이제는 완전히 벗어난 건가. 거의 그렇다. 나는 교육 수준이 높은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길리아니 선생님이나 그녀의 아이들보다 더 수준 높은 아이들과 친구가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시험에 시험을 거치면서 권위 있는 교수님들에게 인정받는 학생이 되었는가. 거의 그렇다.
'거의'라는 단어 뒤에 실상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두려웠다. 피사로 온 첫날부터 나는 두려웠다. 나는 '거의'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남들처럼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두려웠다._560p
나폴리 4부작 제3권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각자의 굴곡진 인생을 살아가는 릴라와 레누 등. 이탈리아의 거친 역사적 상황 안에서 각자 성실히 인생을 살아가지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들,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의 마지막 여정이 궁금해졌던 3권.
가끔 이해되지 않는 인물들의 행동과 선택들이 있었지만 4권에서 이해시켜 주길 기대하며 그녀와 그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향해 가는 3권이었습니다. 그리고 나폴리 4부작을 3권까지 읽고 나니 우리나라의 불안정하고 거칠었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긴 이야기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기며 내년에는 '토지'같은 장편 소설에 한 번 도전해볼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 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_22p
✪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 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_85p
✪ 과거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 과거의 기억이 산사태처럼 무너져 내려 현재의 릴라를 덮쳐왔다._180p
✪ 내면 깊은 곳에서 규율을 위반하고픈 충동이 커져만 갔다. 그 시절 세상 모든 사람처럼 나도 규칙을 깨뜨리고 싶었다. 한 번이라도 결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게 못할 것은 또 뭐가 있단 말인가. 한 번이라도 사는 동안 배워온 모든 것에서, 내가 과거에 쓴 글과 앞으로 쓸 글에서, 내가 세상에 내놓은 아이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_359p
✪ 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여성성을 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하게 애를 썼다. 남성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_397p
나폴리 4부작 제4권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
4부작의 마지막까지 오며 나는 소설을 읽는 즐거움에 한 번 더 눈을 뜬 기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동안 문학보다는 비문학에 편중되는 독서를 해왔고, 그래서 그런지 지식과 배움을 습득하듯 어떤 결과물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도 그 저변에 깔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앤드루 포터, 그리고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을 읽으며 그냥 그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이 겪는 상황을 이해하고 감정을 느끼는 것이 전부일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냥 이야기 속에 함께 녹아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 책의 거의 마지막에 나왔던 문장이 이 책을 읽었던 저의 기분들을 한꺼번에 설명해 주는 듯했습니다. 저도 온전히 녹아들었기에 함께 느꼈던 감정들이겠죠? 내 안에 있는 레누와 릴라가 함께 읽어 내려간, 두 친구의 거의 한평생에 걸친 이야기. 제가 사랑하는 나라인 이탈리아가 배경이라 더욱 마음이 갔던 것도 있던 것 같습니다. 신혼여행으로 갔던 이탈리아에 다시 한번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때 다시 이 책을 펴볼 것 같습니다.
✪ 원래 나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여성이 아니었던 건가. 나 자신을 기만한 것인가. 그동안 보잘것없는 책 두 권으로 모든 여성에게 지금까지 자기 자신에게조차 말하지 못했던 것을 고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조력자 역할을 연기했지만 실은 나야말로 독자들을 기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게 편리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믿었을 뿐 나도 보수적인 내 동년배 여성들과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닐까.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지 나야말로 나나 내 딸들의 욕구보다 사내의 욕구를 더 중요하게 여길 정도로 철저하게 남성에 의해 주조된 여성이 아닐까._151p
✪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어.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과도 달랐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어. '내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 이름조차 없는 어떠한 존재가 내 혈관 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어. 무엇보다도 그 존재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어."_291p
✪ 오히려 릴라가 틀려서 기뻤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릴라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_361p
✪ 모든 것이 황홀하다가 갑자기 사방이 잿빛으로 변했다가 혼탁해졌다가 또 다시 모든 것이 환하게 빛나는 과정이 순환되는 나폴리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마치 구름이 태양 위를 지나갈 때 태양이 구름에서 도망치는 것 같으면서 곧 없어질 듯 희미하고 옅은 원반 모양이 되었다가 구름이 사라지는 순간 손으로 눈을 가려야 할 정도로 갑자기 눈부시게 찬란히 빛나는 것 같았다._618p
이제 잘 가, 릴라와 레누!
'독서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앤드루 포터 단편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사라진 것들' 독서 리뷰 (7) | 2024.11.12 |
---|---|
2024 리딩코리아 선정 도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김승섭 독서 리뷰 (6) | 2024.11.11 |
2023_24. 김이나 에세이 "보통의 언어들" 독서 리뷰 (1) | 2023.11.18 |
2023_23.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독서 리뷰 / 키이라 나이틀리 영화 '오만과 편견' 원작 (2) | 2023.10.14 |
2023_22. 심채경 "천문학자는 별을 보지 않는다" 독서 리뷰 (0) | 2023.1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