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작가는 알고 있었으나 그의 작품을 처음 경험한 것은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서였고, 그의 소설은 한 번도 읽지 않은 채 미디어에서 화자로 활약하는 김영하작가를 접했습니다. 그는 이야기꾼이면서 다양한 주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서 매력이 넘쳤으나 특히 다수를 아우르며 분위기를 밝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그의 매력에 빠져 최근에서야 비로소 그의 소설을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빛의 제국 줄거리
북에서 남으로 보내진 간첩 기영은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북에서 내려온 지 15년 정도가 지나고 북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이후 특별한 사명 없이 남한에 잘 적응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그는 가정도 꾸리게 되었고 풍족하진 않지만 본인의 사업을 이끌어가는 건실한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내려와서 대학생활을 하며 만난 부인과 딸 현미와 함께 평범하게 살아가는 날들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고 명령대로 북으로 귀환하느냐, 현재의 삶에 뿌리를 내리고 고국을 버리느냐의 고민과 사투를 벌이며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빛의 제국 감상평
스파이로서의 삶을 살아가다 보면 고민의 기로에 서게 되는 떄가 올 것 같기도 합니다. 회색분자라는 말처럼 본인이 검은색인지 흰색인지, 이도저도 아닌 사람이 된 것 같은 괴로움도 있을 것이고 이렇게 된 이상 본인이 갈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싶은 마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명령을 내리는 상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는 쉽지 않을 테고, 목숨을 건 최후의 결투 같은 것으로 그 상황을 이겨내고자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마음이 공감하며, 처음 읽어 본 김영하의 소설은 쉽게 읽혀내려갔고, 적당히 무게감도 있으면서 깔끔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김영하의 세계에 한 발 내디뎠습니다.
소설을 리뷰하는 것은 줄거리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노출시킬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하여 굉장히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올해 읽은 책들을 순서대로 리뷰해 가는 것에 집중하여 가감 없이 적어보려 합니다.
인상 깊었던 문장들로 나머지 감상을 대신합니다.
● 이런 적지에서, 전두환 역도가 광주에서 수천의 인민들을 백주에 학살하는 땅에서 긴장도 적개심도 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러나 지금 와 돌이켜보면 권태와 허무야말로 이 사회의 특질이었다. 권태는 무차별적으로 퍼져 있었다. 기영은 권태가 무엇인지는 알았으나 그것을 실제로 목도하기는 처음이었다. 그가 떠나온 사회에서 권태는 자보주의를 비판할 때에나 등장하는 추상적 개념이었다. 물론 그곳에도 권태는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사회의 권태는 차라리 무료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적절한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태라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어떤 자극만 주어진다면 금세 사라질 가볍고 허망한 것이었다. 그러나 처음 맞닥뜨린 자본주의적 권태에는 무게와 질량이 있었다. 그것은 삶을 짓누르고 질식시키는 유독 가스처럼 느껴졌다. 단순히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겼다. 가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보는 사람들도 하여금 즉각적으로 아,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원초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킨다.
● 화학이나 심리학 학위를 따고 한국으로 돌아와 지금쯤이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겠지. 이렇게 우왕좌왕하며 이 직업 저 직업 전전하다 마흔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보험설계사였을 때도, 지금처럼 자동차 영업사원일 때도, 아니 김일성주의를 지지하는 운동권 대학생이었을 때마저도, 그녀는 어느 것 하나 잘한 게 없었고 어디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그렇게 공부를 잘해서 온 학교의 선생들한테 귀염을 받던 내가 왜 그 이후엔 어디에서도, 단 한 번도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을까? 혹시 이것은 누군가의 음모가 아닐까? 이 모든 것이 내가 저지른 과오 때문이라는 결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 누군가의 집요한 악의가, 보이지 않는 손이, 제대로 잘 나가고 있던 내 삶의 행로를 슬쩍 뒤틀어놓은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 - 미국 서부영화를 보면 순 그 얘기잖아. 누군가 자기 집과 농장을 빼앗으면 죽을 때까지 저항하고, 그래도 안되면 복수를 하잖아. 우리에겐 왜 복수의 문화가 없을까? 그렇게 심한 일들을 당하면서 왜 복수하는 얘기는 발달하지 않았을까? 우리 소설 중에 복수를 다룬 소설, 형은 본 적 있어?
- 없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용서는 많이들 하는 것 같은데
- 그렇지? 내 생각에 우리는 선과 악에 대해서 서양 사람들처럼 깊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 옳고 그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니까 복수도 맥이 빠지는 거야. 알고 보면 걔들도 다 불쌍한 놈들이다. 이런 식으로 끝내잖아.
- 그렇지.
- 그러나 아무리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이 분명치 않아도 자기 집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선 누구나 분노할 거야
- 독자들을 열받게 만드는 게 니 목표니?
- 아니, 그렇지만 사람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그 분노를 건드리고 싶어. 그게 있다는 것만은 알리고 싶어. 왜 그렇잖아? 위대한 작품은 그게 나오고 나서야 지금까지 없었던 거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만든다고.
● 바둑을 두다 보면 말이야. 내가 바둑 했었잖아, 빈 데가 더 중요해. 그게 집이라는 건데, 뭐가 차 있는 데가 아니란 말야. 근데 집이 크면, 그니까 많이 비어 있으면 이기는 거야, 바둑이라는 게.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두 보이는 것보다 안 보이는 거, 그런 게 더 중요한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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